홍수는 물이 많다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물이 제 길을 벗어나 들판과 마을을 덮는 상태다.
전승 속에서 우임금은 물을 힘으로 틀어막은 인물이라기보다, 막힌 곳을 터서 강과 하천이 바다로 흐르게 한 인물로 그려진다. 《상서》 〈홍범〉의 주석도 곤(鯀)이 물을 막아 오행의 질서를 어지럽힌 데 비해, 우는 물길을 통하게 하여 그 질서를 회복한 것으로 설명한다.
물을 없앤 것이 아니라 흐르게 했다.
명리에서 제화(制化)를 말할 때에도 이 차이가 중요하다.
어떤 기운이 지나치게 강하면 흔히 그것을 꺾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이 많으면 금으로 자르고, 수가 많으면 토로 막으며, 화가 많으면 수로 끈다는 식이다.
물론 지나친 기운에는 제어가 필요하다.
그러나 힘으로 막는 것만이 다스림은 아니다.
물이 넘친다고 둑만 높이면 당장은 조용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흘러갈 곳을 찾지 못한 물은 둑 뒤에서 더 높이 차오른다. 막힌 힘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갇혀 있을 뿐이다.
명조에서도 왕한 기운을 무조건 눌러버리면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목이 왕하다면 금의 극만 찾기 전에 화로 그 기운이 흘러갈 수 있는지를 본다. 수가 많다면 토로 막는 일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목을 길러 물의 쓰임을 얻을 길이 있는지도 살핀다.
제(制)가 지나친 것에 경계를 세우는 일이라면, 화(化)는 그 힘이 다른 작용으로 이어지도록 길을 내는 일이다.
강한 기운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운이 어디로 가는가이다.
물이 논으로 흘러가면 곡식을 기르지만, 길을 잃고 마을로 들어오면 홍수가 된다. 같은 물인데도 쓰임은 전혀 달라진다.
명조의 오행도 그렇다.
식상이 왕성하면 표현과 생산의 힘이 될 수 있지만, 받아줄 재성이 없고 방향을 잡아줄 구조도 없다면 말과 행동이 흩어질 수 있다. 인성이 많으면 배움과 사유가 깊어질 수 있지만, 밖으로 흘러가는 길이 없으면 생각이 생각을 낳으며 안에서만 맴돌기도 한다.
힘이 크다는 것과 쓸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우임금의 치수는 물을 미워한 이야기가 아니다.
물의 성질을 거스르지 않고 갈 곳을 마련한 이야기다.
천자풀이의 다음 말인 기자추연(箕子推衍)과 홍범구주(洪範九疇)도 질서를 세우는 쪽으로 이어진다.
《상서》 〈홍범〉에서는 기자가 주 무왕에게 옛날 곤이 홍수를 막아 오행의 질서를 어지럽혔고, 뒤이어 우가 일어나 하늘로부터 홍범구주를 받아 질서를 바로 세웠다고 설명한다. 홍범구주는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를 아홉 범주로 나눈 것이다. 기자는 그것을 새로 만든 인물이라기보다 무왕에게 그 뜻을 풀어 설명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흐트러진 것을 몇 개의 질서로 나누어 살핀다.
이 점에서는 명리와도 닮은 구석이 있다.
사람의 삶은 복잡하다.
가족과 일, 재물과 건강, 성정과 관계가 서로 엉켜 있다. 명리는 그것을 음양과 오행, 십신과 궁위, 생극과 왕쇠 같은 몇 개의 틀로 나누어 읽는다.
틀이 없으면 복잡한 현상 속에서 아무것도 구분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틀이 곧 사람의 삶은 아니다.
홍범의 아홉 범주가 세상 자체가 아니듯, 십신의 열 이름도 사람 자체는 아니다. 질서는 복잡한 현실을 읽기 위한 길이지, 현실을 그 안에 억지로 밀어 넣는 상자는 아니다.
물이 지도에 그어진 파란 선을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물이 흐른 자리를 보고 지도에 선을 긋는다.
명리의 이론도 그와 비슷해야 한다.
글자에 맞추어 삶을 깎는 것이 아니라, 글자들이 실제로 어떤 흐름을 만드는지 살핀 뒤 그 관계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
넓을 홍 다음에는 거칠 황(荒)이 나온다.
제제군생 수역중에 화급팔황 거칠 황
팔황(八荒)은 사방과 네 모퉁이의 아득히 먼 곳, 문명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천자풀이는 수많은 생명이 사는 세상에서 교화가 먼 팔황에까지 미친다고 노래한다.
그런데 황은 넓기만 한 땅이 아니다.
아직 개간되지 않은 거친 들판이다.
홍이 넘쳐흐르는 힘이라면, 황은 넓지만 아직 쓰임을 얻지 못한 자리다.
하나는 물길이 필요하고, 다른 하나는 경작이 필요하다.
명조에도 겉으로는 넓고 풍부해 보이지만 아직 쓰임을 얻지 못한 기운이 있다.
재성이 많아도 일간이 감당하지 못하면 재물을 다루는 힘보다 해야 할 일과 책임이 먼저 늘어날 수 있다. 관성이 뚜렷해도 받아들일 바탕이 없으면 직위와 질서보다는 압박으로 느껴질 수 있다.
반대로 지금은 거칠고 쓸모없어 보이는 기운도 때를 만나면 다른 모습이 된다.
황무지는 아무것도 없는 땅이 아니다.
돌과 잡초가 뒤섞여 아직 농사를 짓지 못하는 땅이다. 갈아엎고 물길을 대며 씨를 뿌리는 수고가 들어가기 전까지 그 안의 가능성이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사람의 기질도 비슷하다.
고집은 다루지 못하면 막힘이 되지만, 한곳을 오래 파는 힘이 되기도 한다. 예민함은 자신과 남을 지치게 할 수 있지만, 작은 차이를 알아차리는 감각이 되기도 한다.
좋은 기질과 나쁜 기질이 처음부터 따로 정해져 있다기보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방식으로 쓰이는지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명리에서 병약(病藥)을 말할 때에도 병이 되는 기운을 무조건 제거하려고만 해서는 곤란하다.
지나친 것은 덜어야 하지만, 그 힘을 쓸 길이 있다면 살려야 한다. 부족한 것을 보충하더라도 이미 흐르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황무지를 밭으로 만든다고 땅을 없애지는 않는다.
물길을 낸다고 물을 말려버리지도 않는다.
우주홍황 네 글자를 처음 배울 때에는 우주는 넓고 아득하다는 말로만 들렸다.
천자풀이는 그 넓은 우주 안에 홍수와 황무지를 놓았다.
공간은 넓고 시간은 오래되지만, 세상이 저절로 질서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물은 넘치고 땅은 거칠며, 사람은 그 사이에서 물길을 내고 밭을 일군다.
명조를 읽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이 많고 무엇이 부족한지를 세는 데서 그치지 않고, 넘치는 것은 어디로 흐르게 할지, 거친 것은 어떻게 쓰임을 얻을지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