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은 하늘에 벌여지고, 음식은 상 위에 벌여진다. 별자리 수(宿)는 잠잘 숙으로 바뀌고, 밤하늘의 펼쳐짐은 춘향과 정회를 나누는 방으로 옮겨간다.
천자문의 뜻을 풀이한다면서 몽룡의 마음은 이미 천문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국립국악원은 천자뒤풀이를 천자문의 글자를 정석대로 풀이하지 않고, 춘향과의 만남을 상상하며 엉뚱한 뜻을 붙이는 언어유희요이자 연가로 설명한다. 천문과 고사를 늘어놓는 학식의 외양 아래, 몽룡의 속마음이 조금씩 드러나는 대목이다. (국립국악원)
별 진을 진토로 읽지 않기
명리를 공부하는 사람은 辰(진)을 보면 먼저 진토(辰土)를 떠올린다.
진월, 진시, 진술충, 신자진 수국이 차례로 따라 나온다. 진은 습토이며 수의 고지이고, 그 안에 을목과 계수의 여기가 남았다는 설명도 익숙하다.
그러나 진수열장의 진은 사주 원국에 놓인 지지 진을 곧바로 말하는 글자가 아니다.
옛 천자문 주석에서는 진(辰)을 해와 달이 만나는 하늘의 자리로 설명하기도 하고, 해·달·별을 아우르는 천체의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숙(宿)은 해와 달이 지나가는 별자리 구획이며, 열장(列張)은 그것들이 하늘에 나뉘어 펼쳐진 모습을 가리킨다. (동양고전종합DB)
같은 글자라도 놓인 문장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辰이 명조 안에 들어오면 진토로 읽어야 하지만, 辰宿列張 안에서는 밤하늘의 질서를 말한다. 글자의 기본 뜻을 안다는 것과 그 글자가 지금 어느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명리에서도 이 차이를 자주 놓친다.
진을 보면 습토라 하고, 오를 보면 양인이나 제왕부터 떠올리며, 유를 보면 도화와 금기운을 먼저 붙인다. 익숙한 해석이 빠르게 따라오는 것은 공부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글자를 보기 전에 답부터 꺼내는 습관이 되기도 한다.
진토라고 해서 언제나 같은 진토는 아니다.
봄의 끝에서 목의 여기를 품은 진과, 신자진의 흐름 안에서 수기를 끌어들이는 진은 작용이 다르다. 진술충을 만난 진과 아무런 충동 없이 원국에 머문 진도 같지 않다.
辰이라는 글자 하나에 모든 답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별도 이름만으로 별자리가 되지 않는다.
스물여덟 구역으로 나눈 하늘
천자풀이에서는 진을 풀며 이십팔수와 하도낙서를 함께 불러낸다.
이십팔수 하도낙서 중성공지 별 진
이십팔수(二十八宿)는 동아시아 전통 천문에서 하늘의 적도 부근을 스물여덟 구역으로 나누어 살핀 체계다. 각 구역을 대표하는 별자리인 수(宿)를 정하고, 일곱 구역씩 묶어 동·서·남·북의 네 방향에 배속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의 일곱 수는 각·항·저·방·심·미·기이고, 북방은 두·우·녀·허·위·실·벽이다. 서방과 남방에도 각각 일곱 수가 놓인다.
후대에는 이들을 청룡·현무·백호·주작의 형상과 연결했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흩어져 있다.
사람은 그 별들 사이에 선을 긋고 이름을 붙였다. 서로 떨어져 있는 별을 하나의 형상으로 묶어 방향을 찾고, 계절을 헤아리며, 해와 달이 어느 자리를 지나고 있는지를 살폈다.
별자리란 결국 관계를 읽는 방식이다.
별 하나의 성질을 길게 설명한다고 별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별과의 거리, 놓인 방향, 함께 이루는 형상을 보아야 한다.
명조도 마찬가지다.
여덟 글자를 하나씩 떼어 뜻을 붙이는 것으로는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
갑목은 곧고, 병화는 밝으며, 경금은 단단하다는 식의 설명은 글자의 기본적인 이미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그 갑목이 어느 계절에 놓였는지, 뿌리를 어디에 두었는지, 병화가 갑목의 기운을 받아 밖으로 펼쳐지는지, 경금이 갑목을 다듬는지 뿌리째 끊는지는 글자 사이의 관계에서 정해진다.
별 하나가 아니라 배열을 보아야 한다.
목록과 구조 사이
사주를 처음 배우면 오행의 개수를 세게 된다.
목이 몇 개이고, 화가 몇 개이며, 수가 부족한지를 표처럼 정리한다. 십신도 비견이 몇 개, 재성이 몇 개, 관성이 몇 개인지 확인한다.
이 작업은 명조의 재료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재료의 목록이 곧 구조는 아니다.
별이 일곱 개 있다고 모두 북두칠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해진 위치와 관계를 이루어야 비로소 하나의 형상이 나타난다.
같은 여덟 글자를 놓고도 배열이 바뀌면 명조의 모습은 달라진다.
월지가 무엇을 얻었는지, 천간의 글자가 지지에 통근했는지, 지지에 간직된 기운이 천간으로 투출했는지에 따라 힘의 흐름이 달라진다.
관성이 하나 있다는 사실보다 그 관성이 계절을 얻고 뿌리를 두었는지가 중요하다. 인성이 있다는 사실보다 관성의 기운을 받아 일간으로 이어주는 자리에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식상과 재성이 함께 있어도 식생재의 흐름이 실제로 이어지는 명조가 있고, 글자만 나란히 있을 뿐 중간에서 기운이 막히는 경우도 있다.
명조에 놓였다는 것과 작용한다는 것은 같지 않다.
밤하늘의 별들도 모두 같은 밝기로 보이지 않는다. 계절과 시각이 바뀌면 떠오르는 별과 지는 별이 달라지고, 밝은 달이 뜨면 곁의 흐린 별은 보이지 않는다.
원국에 있던 글자도 운을 만나면 모습이 달라진다.
평소에는 다른 기운에 가려져 있던 글자가 같은 글자를 만나 세력을 얻기도 하고, 떨어져 있던 두 글자가 합이나 충을 만나 갑자기 관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운이 없던 별을 새로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원래 하늘에 있었지만 보이지 않던 별을 드러내기도 한다.
선을 많이 긋는다고 구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별자리는 별 사이에 선을 그어 만든다.
명리도 글자 사이의 관계를 잇는다.
천간합과 지지합, 충·형·파·해, 생과 극, 통근과 투출을 따라 선을 긋다 보면 하나의 구조가 드러난다.
그러나 선을 많이 긋는다고 좋은 해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명조에 있는 모든 글자를 서로 연결하면 복잡한 그물만 남는다. 작은 암합 하나, 멀리 떨어진 반합 하나, 조건이 부족한 합화까지 모두 실제 작용처럼 세우면 어느 명조에서든 거의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때부터 해석은 구조를 읽는 일이 아니라, 원하는 모양이 나올 때까지 별 사이에 선을 긋는 일이 된다.
하늘의 별자리는 아무 별이나 이어 만든 것이 아니다.
오랜 관찰 속에서 일정한 위치와 운행을 확인하고, 반복해서 쓸 수 있는 질서를 만들었다.
명리의 관계도 근거가 필요하다.
월령의 계절성과 글자의 세력, 실제 통근 여부, 생극이 이어지는 방향을 먼저 보아야 한다. 합이 있다고 무조건 합화가 되는 것이 아니며, 충이 있다고 언제나 파괴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별과 별 사이에 선을 긋기 전에, 그 별들이 정말 서로를 보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별자리 수가 잠잘 숙으로 내려오다
여기까지는 제법 점잖은 천문 이야기다.
그러나 천자풀이는 숙(宿)에 이르자 하늘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가련금야 숙창가로다 원앙금침 잘 숙
이십팔수의 수(宿)는 별자리 구획을 뜻한다.
같은 글자를 숙이라 읽으면 머무르거나 잠잔다는 뜻이 된다. 천자풀이는 이 독음과 뜻의 차이를 놓치지 않고, 하늘의 별자리 수를 원앙금침 위에서 잘 숙으로 바꾸어버린다.
별이 춘향의 이불 속까지 내려온 것이다.
원앙금침은 원앙을 수놓은 이불과 베개다. 부부나 연인의 금슬을 상징하지만, 몽룡의 머릿속에서는 그보다 훨씬 직접적인 잠자리다.
천문을 공부하던 선비가 별자리 수를 보는 순간 원앙금침을 떠올린다.
명리 공부를 하다가 宿을 보고 이십팔수의 체계를 생각하는 사람과, 춘향과 함께 누울 자리를 생각하는 몽룡의 차이다.
그렇다고 몽룡이 글자를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다.
글자의 여러 뜻을 알아야 이런 말장난도 가능하다. 천자뒤풀이는 무식한 오독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 일부러 삐딱하게 읽는 재담이다.
학식과 욕망이 같은 문장 안에 들어 있다.
별은 하늘에, 음식은 상 위에
열(列)에 이르면 별자리의 배열은 술상과 음식으로 바뀐다.
절대가인 좋은 풍류 만반진수 벌일 렬
열은 줄지어 벌여 놓는다는 뜻이다.
원문에서는 별자리가 하늘에 배열된 모습을 가리키지만, 천자풀이에서는 만반진수가 상 위에 벌어진다.
하늘의 별과 상 위의 음식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둘 다 흩어진 것이 질서 있게 놓인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좋은 상은 음식의 수만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국과 나물, 고기와 술이 서로 어울리고, 먹는 순서와 자리까지 맞아야 한다. 같은 재료를 한 그릇에 모두 쏟아 넣으면 만반진수가 아니라 뒤섞인 한 그릇이 된다.
명조도 글자가 많다고 풍성한 것은 아니다.
오행이 모두 갖추어졌다고 자동으로 좋은 구조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돕고 이어지는 글자가 있는가 하면, 같은 자리를 두고 다투거나 한쪽의 기운을 지나치게 소모하는 글자도 있다.
만반진수가 벌어져 있어도 몽룡의 눈에는 음식보다 춘향이 먼저 들어왔을 것이다.
명조를 보는 사람도 때로는 비슷하다.
재성과 관성이 보기 좋게 놓여 있으면 곧바로 부귀를 떠올리고, 도화와 홍염이 보이면 인연부터 찾는다.
상 위에 무엇이 놓였는지 보기도 전에 먹고 싶은 것부터 고른다.
펼쳐진 하늘과 펼쳐지는 마음
마지막은 베풀 장(張)이다.
사창월색 삼경야에 경경정회 베풀 장
사창(紗窓)은 비단이나 깁을 바른 창이고, 삼경은 밤이 깊어진 한밤중을 가리킨다.
희미한 달빛이 창으로 들어오는 깊은 밤, 두 사람의 정회가 펼쳐진다.
원문의 장은 별자리가 하늘에 넓게 펼쳐진 모습이다.
천자풀이의 장은 몽룡과 춘향의 마음이 펼쳐지는 밤이다.
하늘의 질서가 사람의 욕망으로 내려왔다.
이것이 천자뒤풀이의 재미다.
거창한 우주론과 천문 지식이 사람 사는 방 안으로 들어오고, 별자리와 하도낙서가 술상과 원앙금침 곁에 놓인다.
명리도 하늘의 간지와 계절을 말하지만, 결국 읽으려는 것은 사람의 삶이다.
오행과 십신이 아무리 정교해도 그것이 실제로 어떤 관계와 사건, 선택으로 드러나는지를 말하지 못하면 밤하늘에 이름만 붙인 별과 다르지 않다.
반대로 사람의 사연만 좇아 글자에 없는 이야기를 계속 덧붙이면, 명리는 근거 없는 별자리 만들기가 된다.
하늘만 보아도 안 되고, 이불만 보아도 안 된다.
천자풀이의 몽룡은 별자리 수를 원앙금침의 잘 숙으로 바꾸어버렸지만,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분명했다.
명조의 글자 사이에 선을 긋는 사람도 그 정도는 분명해야 한다.
무엇을 근거로 연결했는가.
그 선은 실제 구조인가, 아니면 보고 싶은 모양인가.
별 하나만 보고 하늘 전체를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별 사이에 아무 선이나 그어놓고 별자리라 부를 수도 없다.
몽룡은 아마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천문도가 아니라 춘향의 방문이었으니까.
참고 자료
모보경·이상호, 「천자뒤풀이(자시으 생천)」 수록 사설. 이 창본에는 중성공지, 절대가인, 만반진수, 경경정회로 전한다. (벅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