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달은 가랑비에 젖은 부용과 작약이 되고, 남을 여는 평생 보아도 남는 춘향의 자태가 된다. 한 해를 이룬다는 말은 백년동락의 맹세로 바뀌고, 세월 세에 이르면 춘향과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몽룡이 나타난다.
율려에 도착하면 사설의 장단은 더욱 노골적이다.
조강지처를 박대하지 말라는 법을 읊다가, 마지막에는 춘향과 입을 맞추는 글자풀이로 끝난다.
천문과 역법으로 시작한 천자문이 법전과 입맞춤을 거쳐 마무리되는 셈이다. 사용한 사설은 모보경·이상호의 천자뒤풀이에 전하는 문구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다른 창본에서는 성과 려 대목이 조금 다르게 불리기도 한다.
윤달 윤을 젖을 윤으로 읽다
첫 구절부터 천자풀이는 글자를 슬쩍 바꿔 읽는다.
부용작약 세우중에 허정석기 부를 윤
《천자문》의 윤은 윤달 윤(閏)이다.
그런데 사설은 가랑비 속 연꽃과 작약, 젖은 뜰과 돌의 윤기를 말한다. 윤달 윤이 아니라 젖을 윤·윤택할 윤(潤)의 뜻으로 넘어간 것이다.
소리는 같고 글자는 다르다.
천자풀이는 이 틈을 놓치지 않는다.
원래의 閏은 문 안에 임금 왕(王)이 들어간 글자다. 고대에는 달력의 남는 날과 윤달에 관련된 뜻으로 쓰였다. 반면 潤은 물 수변이 붙어 젖고 윤택해진다는 뜻을 가진다.
천자풀이는 윤달의 계산을 설명하는 대신, 비를 맞아 촉촉해진 꽃과 돌을 내놓았다.
역법의 오차가 어느새 춘향의 윤기 나는 자태로 바뀐다.
이런 말장난을 단순한 오류라고 하기는 어렵다.
閏과 潤의 차이를 알아야 일부러 비틀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자뒤풀이는 글자를 몰라 틀리게 읽는 노래가 아니라, 아는 글자를 딴청 부리듯 옆길로 끌고 가는 노래다. 부용과 작약에 가랑비까지 내렸으니, 몽룡에게 윤달 계산을 계속하라고 요구하는 편이 오히려 무리다.
남는 날로 한 해를 이룬다
천자문의 원뜻으로 돌아가면 윤여성세는 달력을 맞추는 이야기다.
달의 차고 기우는 주기를 열두 번 모은 기간은 태양이 계절을 한 바퀴 도는 한 해보다 약 열하루 짧다. 이 차이를 그대로 두면 달력의 달이 계절보다 조금씩 앞서가고, 몇 해 뒤에는 봄을 표시하던 달이 겨울로 밀려난다.
태음태양력에서는 이렇게 쌓이는 차이를 윤달로 보정한다.
《주해천자문》은 해와 달의 주기에서 생기는 남는 날과 모자라는 날을 합하면 해마다 열흘 남짓의 차이가 쌓이고, 이를 윤달로 조절하여 사시와 한 해를 맞춘다고 설명한다.
《상서》 〈요전〉에도 윤달로 사시를 정하고 한 해를 이룬다는 말이 전한다.
이윤월정사시 성세 以閏月定四時 成歲
윤달은 세월을 하나 더 만들어내는 달이 아니다.
이미 생긴 차이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달이다.
달력의 두 움직임이 처음부터 정확히 나누어떨어졌다면 윤달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달은 약 스물아홉 날 반을 주기로 차고 기울며, 태양의 계절은 그와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서로 다른 두 주기를 하나의 달력에 담으려 하니 남는 날이 생긴다.
그 남음은 실수가 아니다.
달과 해가 서로 다른 장단으로 움직인다는 증거다.
오히려 남는 시간을 무시하는 쪽이 틀린 달력을 만든다.
윤달과 명리의 월주는 다르다
윤달 이야기가 나오면 명리에서도 한 가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음력 윤달과 사주의 월주는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윤4월이 있다고 해서 명리의 사월인 사월(巳月)이 한 번 더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태음태양력에서는 달과 계절의 차이를 맞추기 위해 윤달을 넣지만, 명리의 월령은 입춘·경칩·청명·입하와 같은 절기의 흐름을 따라 차례로 이동한다.
전통적인 월건에서는 입춘에 인(寅)을 세우고, 경칩에 묘(卯), 청명에 진(辰), 입하에 사(巳)를 세우는 방식으로 열두 달을 배속한다. 정월을 인월로, 이월을 묘월로 삼는 월령 체계도 이러한 계절의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음력 달력에 윤달이 끼어도 절기의 운행은 멈추지 않는다.
윤4월의 초하루가 왔다고 다시 입하로 돌아가지 않는다. 망종이 되면 오월로, 소서가 되면 미월로 넘어간다.
명리의 월주는 달력책에 적힌 음력 월 이름보다, 태양이 어느 절기의 경계를 지났는지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절기 가까이에 태어난 명조는 날짜만 보아서는 부족하다.
같은 날이라도 교절 시각의 앞인지 뒤인지에 따라 월주가 달라질 수 있다. 절기는 하루 전체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실제로는 특정 시각에 들어온다. 한국천문연구원과 기상청도 24절기를 달력 자료와 기후 자료의 별도 기준으로 제공한다.
명리를 공부하면서 음력 생일만 보고 월주를 정하거나, 윤달이라는 이유로 월지를 한 번 더 반복한다면 윤여성세의 뜻과도 어긋난다.
윤달은 계절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넣는 것이 아니라 계절에 다시 맞추기 위해 넣는 달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보정한다는 것은 임의로 날짜를 고치는 일이 아니다.
어느 움직임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 분명히 하는 일이다.
남는 것은 버릴 것이 아니다
남을 여(餘)는 천자풀이에서 춘향의 미모로 바뀐다.
이러한 고운 태도 일생 보아도 남을 여
평생 바라보아도 아름다움이 남는다는 말이다.
천자문의 餘는 한 해를 만들고도 남는 시간이다. 천자풀이의 餘는 아무리 보아도 다 보지 못한 춘향의 자태다.
두 풀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남는 것이 부족함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계산 뒤에 남는 것을 찌꺼기처럼 생각한다. 정확하게 나누어지지 않은 몫, 처리하지 못한 잔여, 깔끔한 결론을 방해하는 부분으로 본다.
그러나 윤여성세에서는 남는 날이 있어야 한 해가 완성된다.
그 차이를 지워버리면 계산은 단정해질지 몰라도 계절은 틀어진다.
명조를 읽을 때에도 모든 것을 하나의 결론으로 깔끔하게 정리하려는 욕심이 생긴다.
신강인지 신약인지, 용신인지 기신인지, 좋은 운인지 나쁜 운인지 한쪽으로 정해놓으면 설명은 편해진다.
하지만 실제 명조에는 남는 부분이 있다.
일간은 약해 보이지만 뿌리가 끊어지지 않았고, 필요한 글자이면서 다른 자리에서는 부담을 만들기도 한다. 합이 기운을 묶으면서 동시에 다른 관계를 열기도 하고, 충이 익숙한 질서를 깨뜨리면서 막힌 흐름을 움직이기도 한다.
한 가지 이름으로 다 담기지 않는 작용이 남는다.
그 남은 부분을 억지로 지우면 해석은 깨끗해지지만 사람은 사라진다.
윤달을 없앤 달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루었다고 세월이 멈추지는 않는다
다음은 이룰 성(成)과 해 세(歲)다.
백년동락 깊은 맹세 여산약해 이룰 성
우리가 이리저리 노니다 부지세월 해 세
성은 무엇을 이룬다는 글자다.
천자문의 성은 남는 날을 조정해 한 해를 완성한다는 뜻에 놓여 있다. 천자풀이에서는 춘향과 백년동락할 맹세를 이루는 일로 바뀐다.
세는 완성된 한 해다.
그런데 몽룡은 춘향과 이리저리 노닐다가 세월 가는 줄 모른다고 한다.
한 해를 정확히 만들기 위해 윤달까지 넣었던 이야기가, 막상 사랑에 빠지고 나자 시간조차 잊는 이야기로 넘어간다.
달력은 세월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몽룡은 세월을 잊기 위해 춘향을 찾는다.
명리도 시간을 구분한다.
대운을 나누고 세운을 적으며, 월운과 일진까지 내려간다. 언제 어떤 기운이 들어오는지를 세밀하게 나눈다.
그러나 시간을 세밀하게 나눈다고 삶을 더 오래 사는 것은 아니다.
운을 헤아리는 동안에도 세월은 흐른다.
좋은 운이 오기를 기다리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놓치기도 하고, 불편한 운이 끝나기만 바라보다 그 시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을 보지 못하기도 한다.
몽룡은 적어도 자신이 기다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입춘인지 경칩인지 따질 겨를도 없이, 해가 지면 춘향에게 갈 생각뿐이었다.
그것이 명리적으로 현명한 선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부지세월이라는 글자에는 썩 잘 어울린다.
서로 다른 소리를 없애지 않는 법
윤여성세가 시간의 차이를 맞추는 일이라면, 율려조양은 소리와 음양의 차이를 맞추는 일이다.
율려(律呂)는 전통 음악에서 음높이의 기준이 되는 열두 음률을 가리킨다. 여섯 양률과 여섯 음려가 번갈아 열두 율을 이루며, 황종을 출발점으로 각기 다른 길이의 율관에서 높고 낮은 소리를 얻었다.
긴 관은 낮고 무거운 소리를 내고, 짧은 관은 높고 맑은 소리를 낸다. 《주해천자문》은 율려조양을 율관으로 기운을 살펴 음양을 조화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모든 관을 같은 길이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길이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소리가 난다.
조율은 높은 소리를 모두 낮추거나, 낮은 소리를 모두 높여 한 음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다. 각 소리가 전체의 장단 속에서 제자리를 찾도록 맞추는 일이다.
명리에서 중화(中和)를 생각할 때도 이 장면이 도움이 된다.
중화는 목·화·토·금·수를 같은 수량으로 맞추는 일이 아니다.
봄에는 목이 왕하고 여름에는 화가 왕하다. 가을에는 금이 힘을 얻고 겨울에는 수가 깊어진다. 모든 오행의 세력이 똑같다면 오히려 계절의 특징이 사라진다.
필요한 것은 차이의 제거가 아니라 관계의 조절이다.
왕한 기운이 다른 기운을 모두 밀어내지 않도록 길을 내고, 약한 기운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생이 지나치면 설기로 돌리고, 극이 과하면 생조로 받아들이며, 막힌 곳이 있으면 통관할 기운을 살핀다.
율관마다 길이가 다르듯 명조의 기운도 처음부터 고르게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명조는 목이 길고, 어떤 명조는 금이 높다.
문제는 다르다는 데 있지 않다.
그 차이가 전체의 음악을 만들고 있는지, 아니면 한 음이 다른 소리를 모두 덮어버리는지에 있다.
조후는 온도계가 아니다
율려의 조율은 조후(調候)라는 말도 떠올리게 한다.
조후는 계절의 한난조습을 살펴 기운이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맞추는 일이다.
겨울의 차가운 목에는 불의 온기가 필요할 수 있고, 여름의 메마른 토에는 수의 적심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겨울에는 무조건 화, 여름에는 무조건 수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적용할 수는 없다.
필요한 불도 너무 크면 나무를 태우고, 필요한 물도 지나치면 뿌리를 썩게 한다.
음 하나가 맞는다고 음악 전체가 맞는 것은 아니다.
황종의 음이 정확해도 나머지 율려가 제 간격을 잃으면 곡은 흐트러진다. 조후 역시 원국의 왕쇠와 통근, 생극제화의 흐름을 떠나 혼자 쓰일 수 없다.
필요하다는 것과 많을수록 좋다는 것은 다른 말이다.
조율은 소리를 크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제 음을 내게 하는 일이다.
조강지처를 말하며 춘향을 찾다
천자풀이의 율(律)은 음악에서 법률로 넘어간다.
조강지처 박대 말어라 대전통편에 법중 률
율은 음률의 기준이면서 법률의 율이기도 하다.
사설은 조강지처를 박대하지 말라는 말을 《대전통편》의 법처럼 끌어온다. 《대전통편》은 1785년 《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이후 법령을 통합해 편찬한 조선 후기의 법전이다. 다만 천자풀이의 문장은 실제 특정 조문을 인용한 것이라기보다, 누구나 아는 법전 이름을 끌어와 “법으로도 안 된다”고 과장하는 재담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
문제는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몽룡이라는 데 있다.
조강지처를 박대해서는 안 된다고 점잖게 법을 말하면서, 마음은 온통 춘향에게 가 있다.
더구나 두 사람은 아직 백년해로한 조강지처도 아니다.
법을 읊는 입과 욕망을 말하는 입이 따로 논다.
율려로 음양을 조화한다더니 몽룡의 말부터 장단이 맞지 않는다.
이 모순이 천자뒤풀이의 맛이다.
경전과 법률의 말을 끌어와 자기 욕망을 포장하지만, 포장이 너무 얇아 속마음이 훤히 비친다.
두 입이 마주 보는 글자
마지막 여(呂)에 이르면 천자풀이는 더 이상 점잖은 척하지 않는다.
분벽사창 고운 방에 춘향과 둘이 마주앉아
입을 대고 정담하면 법중 려 자 되겠구나
呂는 본래 음률의 이름에 쓰이는 글자다.
율과 여가 함께 열두 음률을 이룬다.
그러나 사설은 呂의 생김새를 위아래로 마주한 두 개의 입 구(口)처럼 바라본다. 몽룡의 입과 춘향의 입이 마주 닿으면 呂자가 된다는 것이다.
글자의 형태를 이용한 노골적인 파자다.
윤달과 음률의 질서를 설명하던 천자문이 두 사람의 입맞춤으로 끝난다.
하늘과 땅이 열리고, 우주가 펼쳐지고, 해와 달이 돌며, 별자리와 사계절이 지나왔다. 남는 날까지 보태 한 해를 완성하고, 마침내 음양의 소리도 맞추었다.
그 긴 우주의 결론이 춘향과 몽룡의 두 입이다.
생각해보면 그리 엉뚱한 결말만은 아니다.
천자문이 말하는 음양도 결국 서로 다른 두 기운의 감응을 떠나서는 움직일 수 없다. 다만 경전에서는 그것을 율려로 조절하고, 몽룡은 훨씬 직접적인 방법을 택했을 뿐이다.
선비들이 꼽은 가장 좋은 소리
이 대목에는 비슷한 조선의 재담 하나를 곁들일 만하다.
율곡 이이의 말로 잘못 전해지는 경우가 있지만, 확인되는 기록에서는 백사 이항복의 이야기다.
홍만종의 패설집 《명엽지해》에 실린 〈희청군성(喜聽裙聲)〉에는 정철·유성룡·심희수·이정구·이항복이 술자리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를 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밝은 달밤 누각에서 들리는 노랫소리, 가을 산의 소리, 잠에서 깬 새벽 술독에 술 떨어지는 소리, 산속 초당에서 선비가 시를 읊는 소리가 차례로 나온다.
마지막에 이항복이 웃으며 말한다.
좋은 밤 신방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치마를 푸는 소리만 한 것이 없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후대 패설에 기록된 재담이므로 실제 술자리의 발언을 그대로 옮겼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율곡 이이의 말이 아니라, 전승 기록에서는 백사 이항복에게 붙은 이야기라는 점은 구분해야 한다.
율려로 천지의 가장 바른 소리를 정한다는 말 곁에 놓고 보면 묘하게 어울린다.
선비들은 달빛과 바람, 시와 술의 소리를 한참 논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신방의 치마 푸는 소리로 내려왔다.
몽룡도 법중 률을 읊다가 법중 려의 입맞춤으로 내려왔다.
하늘의 음률은 높고 장엄하지만, 사람이 가장 반가워하는 소리는 대개 그보다 가까운 곳에서 난다.
남는 날과 어긋난 장단
윤여성세는 남는 날을 버리지 않는다.
율려조양은 서로 다른 소리를 같은 음으로 만들지 않는다.
하나는 차이를 보태 계절을 맞추고, 다른 하나는 높낮이를 조절해 장단을 맞춘다.
명리에서 균형을 찾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
남는 것을 억지로 지우지 않고, 다른 것을 무조건 같은 크기로 만들지 않는 것.
계절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지나친 기운에는 길을 내고, 부족한 기운에는 제 역할을 할 자리를 마련하는 것.
다만 천자풀이가 마지막까지 점잖은 교훈으로 끝날 리는 없다.
달력의 어긋남은 윤달로 맞추고, 음률의 어긋남은 율려로 맞춘다.
몽룡은 조강지처를 박대하지 말라는 법까지 읊었다.
그런데 춘향 앞에 앉자마자 입부터 맞출 궁리를 한다.
천지의 음양은 그럭저럭 조화를 이루었지만, 몽룡의 장단은 처음부터 그쪽으로 기울어 있었던 모양이다.
참고 자료
모보경·이상호, 「천자뒤풀이(자시으 생천)」 수록 사설. 백년동락 깊은 맹세, 분벽사창 고운 방, 입을 대고 정담하면 법중 려자 되것구나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