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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잡상

비결을 외우던 시대와 지금의 명리 공부

by 夢遊 2026. 10. 2.

요즘 《자평가(字評歌)》를 자주 들여다본다.

한 구절이 이상하면 다른 자료를 찾아보고, 같은 문장이 다른 곳에는 어떻게 적혀 있는지 비교한다. 글자 하나 때문에 며칠을 붙들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러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옛사람들은 이런 가결(歌訣)을 어떻게 공부했을까.

지금 내게는 검색하면 금방 찾을 수 있는 몇 줄의 문장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어렵게 구하고, 배우고, 외워서 간직해야 했던 비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다.

옛날에는 책이 귀했으니 많이 외웠을 것이고, 지금은 책도 많고 검색도 되니 덜 외우게 된 것 아닐까.

그런데 조금 찾아보다 보니 이야기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조선시대에는 명과학(命課學)이라는 것이 있었다.

관상감(觀象監)에서 명과학을 가르쳤고, 음양과(陰陽科)를 통해 관련 관원을 뽑았다. 가르치는 일을 맡은 훈도(訓導)라는 자리도 있었다.

시험 방법을 보면 더 재미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의 명과학 취재(取才) 규정에는 《원천강(袁天綱)》은 책을 보지 않고 돌아앉아 강독하게 하고, 《오행정기(五行精記)》·《자미수(紫微數)》·《서자평(徐子平)》·《난대묘선(蘭臺妙選)》 같은 책은 펼쳐 놓고 강독하게 했다고 한다.

처음 이 대목을 보고 조금 의외였다.

나는 막연히 옛 공부라면 책을 통째로 외우는 모습부터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외워 두어야 하는 것이 따로 있었고, 책을 보면서 제대로 읽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도 따로 있었던 것 같다.

책을 덮고 하는 공부와 책을 펼쳐 놓고 하는 공부를 구별한 셈이다.

세종 때 명과학을 배우던 맹학생들의 기록도 흥미롭다. 사흘에 한 번 모여 배우고, 나머지 날에는 배운 것을 외워 익혔다고 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록된 명과학 교재에도 《서자평》·《오행정기》·《자미수》·《난대묘선》 같은 책이 들어 있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면 가결 몇 줄을 반복해서 외우는 풍경이 그리 낯설지는 않다.

그렇다고 그 공부가 단순 암기였다고 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어떤 것은 외우고, 어떤 것은 펼쳐 보며, 모르는 대목은 스승에게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암기와 이해를 굳이 서로 반대되는 공부법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외우는 것이 곧 읽기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책을 구하는 일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고전은 인쇄본으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필사본(筆寫本)으로도 이어졌다.

한 사람이 베낀 책을 또 다른 사람이 베끼고, 그 책을 다시 누군가 베낀다.

그러다 보면 비슷한 글자를 잘못 옮길 수도 있고, 한 글자가 빠지거나 앞뒤가 바뀔 수도 있다. 그래서 서로 다른 본문을 대조하고 잘못된 글자를 바로잡는 일도 오래전부터 이루어졌다. 인쇄된 책이라고 그런 확인이 필요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니 어렵게 책 한 권을 구했다고 해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을 것 같다.

한 문장이 이상하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내가 뜻을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이 글자가 잘못된 것인가.

다른 책에는 어떻게 적혀 있을까.

요즘 내가 《자평가》의 이상한 글자 하나 때문에 다른 자료를 뒤지고, 이본(異本)을 대조하고, 앞뒤 문장을 다시 읽는 것과 질문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만 그 질문을 풀어 가는 방법은 사뭇 다르다.

나는 몇 초 만에 다른 자료를 열 수 있다. 검색어 몇 글자를 넣으면 비슷한 문장을 찾아볼 수도 있다.

그때는 비교할 책을 만나는 일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이 차이가 컸을 것 같다.

그래서 옛사람이 한 문장을 오래 들여다본 까닭도 꼭 지금 사람보다 집중력이 뛰어나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책으로 금방 달아날 수 없는 환경이었으니, 손에 들어온 한 권을 오래 붙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조선의 명과학 제도는 근대로 넘어오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명리 공부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더는 조선의 관상감처럼 국가가 정해 놓은 명과 교재와 시험과목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으니, 배우는 길도 달라졌을 것 같다.

어떤 스승을 만났는가.

무슨 책을 구했는가.

누구에게 어떤 관법(觀法)을 들었는가.

얼마나 많은 명조(命造)를 직접 보았는가.

이런 것들이 더욱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현대명리학탐방》 강의자료를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계 박재완 선생은 어릴 때 한학을 배우고, 중국에서 완보 선생에게 태을수·황극수·명리를 배웠으며, 귀국 뒤 명리에 매진하고 다시 후학에게 정통명리를 가르친 것으로 소개된다.

이 이야기의 한쪽에는 스승이 있다.

배우고, 익히고, 다시 가르친다.

자강 이석영 선생의 이야기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읽힌다.

《연해자평》·《명리정종》·《적천수》·《궁통보감》 같은 고전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실제 경험을 쌓은 뒤, 그것을 《사주첩경》으로 정리했다는 설명이 나온다.

이 대목에서는 책과 오랜 실전 경험이 공부의 또 다른 축으로 보인다.

물론 실제 공부가 그렇게 깔끔하게 둘로 갈렸을 리는 없을 것이다.

스승에게 배운 사람도 책을 읽었을 것이고, 책으로 공부한 사람도 다른 술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느껴진다.

공부의 길이 스승과 책, 경험 사이로 여러 갈래 뻗어 있는 듯하다.


조금 더 가까운 시대로 오면 독학으로 길을 찾아간 사람의 이야기도 만난다.

《현대명리학탐방》에서 강헌 선생이 자신의 공부 과정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명리를 독학으로 시작했고, 《사주정설》 같은 입문서와 《연해자평》·《명리정종》·《자평진전》·《적천수천미》·《궁통보감》 같은 고전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한다. 처음 2년 동안은 자신의 명식만 보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건 앞의 공부와 또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스승이 순서를 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궁금한 것을 따라 책에서 책으로 움직인다.

한 책에서 막히면 다른 책을 펼친다.

출판물이 늘어나고 번역서와 입문서가 많아지면서 이런 공부를 할 수 있는 길도 넓어졌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한 사람의 서재가 작은 학교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 배웠는가만큼 무슨 책을 읽었는가도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렇게 스승과 서재를 오가던 공부가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내가 듣고 있는 동양학과 수업도 그렇다.

《명리학개론》을 듣고, 《명리학사》를 배우고, 《자평진전평주》 같은 고전을 읽고, 통변과 현대 명리의 여러 관법을 배운다.

이것을 옛 관상감 명과학의 부활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목적도 다르고, 제도도 다르고, 배우는 내용과 학문적 환경도 다르다.

그래도 묘한 느낌은 있다.

한때 국가 제도 안에서 이루어지던 교육이 중단되었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일부 대학에서는 명리를 다시 정규 교육과정 안에서 배우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의 학교가 주는 가장 큰 것이 자료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자료만 놓고 보면 인터넷에 훨씬 많게 느껴진다.

오히려 지금 더 귀한 것은 순서인지도 모른다.

무엇부터 보고,

그다음 무엇을 보고,

기초를 어느 정도 익힌 뒤 어떤 고전으로 넘어갈 것인가.

자료가 부족할 때에는 자료를 구해 주는 스승이 귀했을 것이다.

자료가 넘치는 지금은 읽을 순서를 잡아 주는 스승이 더욱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명리학개론》 교재에서 명리의 학습 통로를 독학·비법 전수·유튜브 같은 비제도권 학습과, 학습 로드맵과 평가 체계를 갖춘 제도권 교육으로 나누어 놓은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부할 것이 없는 시대가 아니라 너무 많은 시대에는 길을 정해 주는 일도 교육의 중요한 몫이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학교 공부를 컴퓨터 앞에서 하고 있다.

수업을 듣다가 궁금한 것이 생기면 교재만 보는 것이 아니다.

원문 PDF를 찾는다.

다른 판본을 찾는다.

같은 문장이 다른 책에 어떻게 나오는지 검색한다.

번역을 비교하고, 논문을 찾기도 한다.

여러 고전의 원문을 중심으로 번역과 해설을 연결한 고전 코퍼스(corpus, 말뭉치)를 만들고, 한꺼번에 검색하기도 한다.

글자 하나가 의심되면 영인본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판단이 서지 않으면 AI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AI가 내놓은 답도 다시 원문과 다른 자료를 찾아 확인한다.

가끔 생각하면 좀 이상하다.

옛사람이라면 어렵게 구했을 책을 나는 한 화면에 몇 권씩 열어 놓고 본다.

“어디선가 이런 구절을 읽었는데” 하고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많이 줄었다.

검색하면 된다.

명조도 손으로 하나하나 계산하지 않고 프로그램으로 산출한다. 조건을 걸어 비슷한 사례끼리 다시 모아 볼 수도 있다.

정말 엄청나게 편해졌다.

그런데 편해진 만큼 공부가 쉬워졌느냐고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어려움이 생겼다.

한 책을 읽다가 모르는 것이 나오면 다른 책을 연다.

그 책에서 또 문제가 생기면 세 번째 책을 연다.

논문을 하나 읽다가 참고문헌을 따라간다.

AI에게 물어봤더니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책 이야기가 나온다.

또 찾는다.

그러다 보면 책은 열 권이 열려 있는데 처음 무엇이 궁금했는지 희미해질 때도 있다.

옛사람에게는 자료를 구하는 것이 어려웠다면,

지금 나에게는 자료 찾기를 멈추는 것이 더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요즘 만들고 있는 명리 고전 코퍼스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처음에는 이것을 공부하기 위한 준비라고 생각했다.

원문을 모으고,

이본을 비교하고,

한글 독음을 붙이고,

번역과 해설을 정리하고,

검색할 수 있게 만들어 놓는다.

그러고 나면 그때부터 제대로 공부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싶다.

《자평가》의 글자 하나를 확인하려고 여러 자료를 비교하다 보면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된다.

왜 여기서는 이 글자가 들어갔을까.

다른 본에서는 왜 다른 글자를 썼을까.

한 글자를 바꾸면 뜻이 얼마나 달라질까.

앞뒤 문장과는 어느 쪽이 더 자연스럽게 이어질까.

이런 것을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는다.

나는 이미 그 문장을 공부하고 있다.

그렇다면 코퍼스를 만드는 것은 공부하기 위한 준비일까.

아니면 그 과정 자체가 이미 공부일까.

요즘은 후자 쪽에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도 걱정은 남는다.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으니 내가 너무 외우지 않는 것은 아닐까.

프로그램이 있으니 계산을 덜 하고,

검색이 있으니 기억을 덜 하고,

AI가 있으니 생각을 덜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가끔은 배운 것이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인지 컴퓨터 안에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예전 같으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머릿속에 넣어 두었을 것들을 이제는 컴퓨터에 맡겨 둔다.

몇 쪽에 무슨 문장이 있는지,

어느 판본에 다른 글자가 있는지,

어떤 명조가 어떤 조건에 해당하는지.

이런 것은 잘 정리해 두면 내가 기억을 더듬는 것보다 훨씬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아마 모든 자료를 머릿속에 넣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신 명조를 보았을 때 무엇부터 볼 것인지,

왜 이 구절이 여기에서 필요한지,

어떤 설명이 어딘가 이상한지,

무엇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지는 내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자료는 밖에 둘 수 있어도 판단하는 순서까지 밖에 두어서는 곤란할 것 같다.

어쩌면 옛 공부와 지금 공부의 중요한 차이는 기억의 양보다, 무엇을 자기 안에 남겨 두고 무엇을 밖에 맡길 것인가가 달라진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재미있는 모순을 하나 발견했다.

나는 컴퓨터와 데이터베이스와 AI까지 동원해서 고전을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명리 노래를 만들고 있다.

수천 쪽의 고전을 검색할 수 있게 만들어 놓고, 정작 중요하다고 생각한 몇 줄은 노래로 만들어 외운다.

생각해 보면 조금 우습다.

최신 도구를 잔뜩 동원해 옛 책을 정리해 놓고 마지막에는 다시 가결을 만드는 셈이다.

그런데 이것도 꼭 모순은 아닌 것 같다.

코퍼스는 내가 모두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을 대신 기억해 준다.

노래는 그 가운데 내가 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을 다시 내 안으로 가져온다.

옛사람들이 왜 가결을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모두 알 수는 없다.

다만 복잡한 내용을 짧은 문장과 운율에 넣어 반복해서 기억하는 데 꽤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나도 결국 비슷한 필요를 느끼고 있는 셈이다.

다만 순서가 반대인지도 모르겠다.

가결을 붙들던 사람은 몇 줄에 담긴 뜻을 배움과 경험으로 넓혀 갔을 것이다.

나는 너무 많은 책과 자료를 한꺼번에 펼쳐 놓고, 그중 무엇을 오래 가져갈 것인지 골라 다시 몇 줄로 줄인다.

가결을 붙들던 옛 공부가 몇 줄에서 많은 것을 꺼내는 공부였다면, 지금의 내 공부는 너무 많은 것 가운데 몇 줄을 골라내는 공부인지도 모르겠다.


《자평가》를 보다가 시작한 생각이 여기까지 왔다.

처음에는 그저 옛사람들은 책이 귀했으니 많이 외웠겠구나 싶었다.

조금 더 찾아보니 외우는 공부와 펼쳐 읽는 공부가 함께 있었고, 서로 다른 본문을 놓고 고민하는 일도 있었다.

근현대 명리인들의 이야기에서는 스승에게 배우는 공부와 책을 붙들고 자기 관법을 만들어 가는 공부가 겹친다.

책으로 독학하는 길도 있고, 지금은 학교의 정규 과정에서 배우는 길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수업을 컴퓨터로 들으면서 수백 년 전 책의 다른 판본을 찾고, 코퍼스를 뒤지고, AI에게 질문한다.

어느 시대의 공부법이 더 좋은지는 모르겠다.

아마 그렇게 간단히 비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부족함이 있었고, 지금에는 지금의 과잉이 있다.

옛사람에게는 어렵게 얻은 것을 잊지 않는 일이 중요했다면,

지금 나에게는 끝없이 나오는 것 가운데 무엇을 오래 붙들 것인가가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도 《자평가》 몇 줄을 들여다본다.

한 글자가 이상하면 다른 판본을 찾는다.

뜻이 궁금하면 다른 고전을 열어 본다.

찾은 것은 코퍼스에 기록해 둔다.

그러다 정말 오래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만나면 노래로 만들어 본다.

밖으로 잔뜩 펼쳐 놓았다가,

그 가운데 몇 줄을 다시 내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도구는 정말 많이 달라졌다.

그런데 공부라는 것이 결국 읽다가 의심하고, 다시 찾아보고, 틀리면 고치고, 여러 번 되풀이하면서 조금씩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라면,

그 마음까지 아주 달라진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夢遊-

참고

  • 국립국어원 「말뭉치 소개」 — 말뭉치(corpus)는 말이나 글을 컴퓨터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모아 놓은 언어 자료를 뜻한다. 본문의 ‘고전 코퍼스’는 이 뜻을 바탕으로, 명리 고전 원문을 중심에 두고 번역·해설·관련 정보를 연결해 검색할 수 있도록 정리한 연구용 자료를 가리킨다. 말뭉치 소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과학(관상감)」 — 조선시대 관상감의 명과학, 훈도, 음양과와 명과학 제도의 폐지 시기 관련. 해당 항목
  • 《대전통편》 예전(禮典)·취재(取才)·명과학(命課學) — 《원천강》의 배강과 《오행정기》·《자미수》·《서자평》·《난대묘선》 등의 임문 강독 규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과학교육」 — 세종 때 맹학생의 학습 방식과 《경국대전》에 수록된 명과학 교재 관련. 해당 항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지학」 — 필사 전승에서 생기는 본문의 차이와 대조·교정에 관한 설명 참고. 해당 항목
  • 원광디지털대학교 동양학과 학과소개 및 교과과정 — 정규 대학 교육과정에서의 동양학·명리학 학습 구조 참고. 학과소개
  • 원광디지털대학교 《명리학개론》 1주차 「명리학의 다양한 학습채널」 참고.
  • 원광디지털대학교 《현대명리학탐방》 강의자료 — 도계 박재완·자강 이석영과 강헌의 학습 과정 관련 대목 참고.